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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ㆍ 나의 성장기

  ㆍ [벌판다방]의 가수

  ㆍ 1집이 나오기까지

  ㆍ 작은 보금자리를 꾸미고

  ㆍ 얼굴없는 가수

  ㆍ 가수는 나의 천직

  ㆍ 연재를 마치며

 

- 김현식님의 자필 수기 전문입니다.

 

 

1집 앨범을 내고 나는 서라벌의 식구가 되었다. 당시 서라벌 레코드사의 이수안 전무는 나를 많이 이해해주셨고 용기를 북돋아주어 지금도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막상 1집을 내고 나서 나는 묘한 허탈감과 외로움에 빠져들었다. 어릴때부터 느꼈던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자꾸만 무겁게 내 가슴에 앉혀왔다. 그럴때면 나는 무작정 기타를 메고 나가 신촌과 명륜동 일대를 배회했다. 아무 카페나 들어가서 노래부르고 그러다 술친구들을 만나면 술을 마시고 하는 식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세상과 인생에 대해 얘기하고, 어떤 때는 의견차이로 가끔씩 싸우기도 했다.

그러면서 당시 대학가에서 읽혀지던 이념서적도 그때 몇권 읽었고, 그림을 그리거나 문학을 하는 사람들과도 가끔 어울렸다. 아마 그때 소설가 황석영씨와 김지하 시인도 어떤 자리에서 한번 본적이 있었던 것 같다.

어느날 나는 또 여느때와 같이 주체할 수 없는 외로움에 신촌길을 걷다가 우연히 옷가게에 들렀다. 그냥 무심히 옷이나 구경하러 들어갔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자꾸 옷보다는 그 안에 앉아있던 가게주인일 듯 싶은 여자에게 관심이 쏠렸다.

결국 나는 그날 나와는 전혀 어울리지도 않는 옷을 맞춰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녀를 더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뒤로 나는 계속 그 가게에 들렀다. 물론 옷에 대한 거래가 다 끝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점차로 나는 그 가게뿐만 아니라 그 여자가 다니는 어느 곳에나 불쑥불쑥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여자는 그럴 때마다 놀랐고, 아마 놀라는 만큼 나를 좋아하게 됐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나는 감히 그 여자와의 결혼생각은 하지 못했다. 유복한 집안에서 곱게 자라온 그녀가 아무런 대책도 없고, 직업마저 일정치 않은 무명가수와 결혼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다만 나는 그녀가 좋았고, 보고 싶었고, 그럴 때마다 보려고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점차로 그녀와 나 사이에는 결혼에 관한 모종의 약속이 생겨갔다. 나를 좋아할 수 있는 순수한 마음을 가진 그녀가 나는 영원히 함께 살고 싶도록 점점 좋아졌으며, 그녀 역시 나와의 결혼을 어느때부터 진지하게 고려하는 것 같았다.

82년 본, 결국 그녀와 나는 명동의 YMCA 강당에서 결혼했다. 주례는 잘 아는 어느 목사님이 봐줬고 사회는 중학교 동창으로 당시 전도사 일을 하고 있었던 친구가 맡았다. 이름난 가수들은 한명도 안왔지만 이름난 세션맨들은 많이 와서 나의 결혼을 축하해줬다.

그리고 동부이촌동의 작은 공무원아파트에 나의 가정을 꾸몄다.

막상 결혼을 했지만 가정을 경제적으로 꾸려가기는 막막했다. 겨우 음반을 한장낸 무명의 가수가 한 가정을 지탱할 수입이 있을리도 만무했고 아내 또한 결혼을 하면서 의상실을 정리해 별반 수입이 없었다. 더구나 그해 12월 나의 분신 완제가 태어나면서 생계는 점점 더 곤란해졌다.

참다못한 우리 부부는 집옆 동부이촌동에 가게를 내기로 했다. 마침 캐나다에 살던 이모가 귀국해 가게나 하나 차리라며 그때 돈으로 약 8백만원 정도를 빌려주었다. 어떤 가게를 차릴까 생각끝에 아내의 피자 만드는 솜씨를 살려 조그만 피자가게를 내기로 했다. 서둘러 가게를 얻고 간판을 걸었다. 사장은 아내였고 나는 배달부장쯤 되었다. 아무튼 우리 부부는 아내는 피자만드는 평소의 솜씨로 피자를 만들었고, 나는 자전거 타는 솜씨로 피자를 배달하면서 열심히 일했다.

그때도 나는 얼굴없는 가수였기 때문에 나르는데는 별문제가 없었지만 그래도 가끔 나의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당황하는 사람들은 나를 알아보는 쪽이었지, 나는 조금도 당황하거나 부끄럽지 않았다. 오히려 나와 식구들은 위해 노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곧잘 되던 가게가 주변의 크고 화려한 피자집들이 늘어나면서 점점 그야말로 파리를 날리기 시작했다. 아내와 내가 하는 조그만 가게가 피자전문 요리사까지 갖추고 기업적으로 운영하는 피자가게들과 경쟁이 될리가 없었다. 결국 꼭 1년을 하고서 가게 전세금까지 빼내 운영하느라 진 빚을 갚고 문을 닫아버렸다. 이모가 빌려준 8백만원을 1년만에 깨끗이 날린 셈이다.

그리고는 일단 집에서 칩거했다. 혼자서 살아갈 때는 어찌어찌 살았겠지만 한 가정을 이끌고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 삶에 일종의 부담이기도 했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원해서 만든 가정을 유지해야 할 신성한 의무였다.

그러나 가수라는 직업을 가지고 한 가정을 유지하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었다.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만들고 열심히 부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노래를 불러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했다. 이때쯤 나는 음반도 한장 더 내야겠다고 생각했고 밤무대에서 노래를 부를 방법도 알아보기 시작했다. 다른 일을 하지 않고 노래를 불러서만 모든 내 생활이 이루어지기를 계획했던 것이다.

나는 세종호텔 나이트클럽에 나가면서 밤무대와 생활을 시작했다. 매일밤을 거르지않고 나간다는 것이 마치 직장같아 마음에 걸렸지만 대신에 안정된 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당시 한창 사람이 붐비던 크라운호텔의 나이트클럽에도 나갔고 하얏트에도 나갔다.

밤무대의 생활은 좀 묘한데가 있었다. 술 마시고 춤추고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노래한다는 것은 어떤땐 나를 열기에 들뜨게도 했고 그러나 어떤때는 자꾸 내 스스로의 음악을 뺐기는 것같은 느낌도 있었다. 새벽녘에 스케줄을 끝내고 들어올때면 몸은 파김치처럼 무거웠고 아무도 없는 집근처의 골목에서 나는 매일매일 외로웠다.

밤무대에 서면서 나는 그룹에 대한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룹은 누가 리더이고 기타주자이고 드럼주자이고 하는 각각의 파트를 떠나서 서로 하나의 사운드를 만들어내는 생명체였다. 눈짓만으로도 교환되는 긴밀한 호흡과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으면 소리는 어느 구석에서라도 조금씩 무너지게 돼 있었다. 그러니 맘에 맞는 그룹과 함께 연주를 하는 것이 일단 궤도에 오르기만 하면 노래 부르는 가수로서는 그보다 더 좋을 수가 없었다. 노래뿐만이 아니라 반주에서 나오는 사운드까지 어느 정도 파악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훨씬 더 완성도가 높은 음악성을 보여 줄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 서서히 다운타운에서는 김현식이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1집에 수록된 곡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기억하는 사람도 많아 어떤때는 한번의 무대에서 몇번씩 이 곡을 신청받기도 했다.

 
 

 

 

그를 기억하고자 만들어진 공간입니다… 2001년 01월 21일 ~ 2019년 04월 22일… … 전체방문자 252,808  오늘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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