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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담겨 있던 음악   

                   -故 김현식의 휴먼다큐 

 

1958년 1월 7일-1990년 11월 1일,한국 최고의 소울&블루스 싱어 김현식이 32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6집 녹음 중에 숨을 거두었던 그의 노래는 고독과 슬픔의 응어리였고 삶은 음악의 아름다운 선율 그자체였다. 그가 떠난 지금도 그가 다하지 못한 노래를 그리워하는 추모 행사가 이어져 그가 남긴 가요계의 깊은 발자욱들을 더듬어 보게한다.

* 삶속에 숨겨진 고독,방황 그리고 음악 *

김현식은 1958년 1월 7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당시 아버지는 사업가로서 어느정도의 성공을 거두었던 분이었고 할아버지 역시 사업을 하셨던 분으로 충남 홍성에서는 알아주는 유지였다. 그리고 외할아버지 또한 충북 옥천에서는 유명한 만석꾼의 아들로 영국 옥스포드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온 영문학자로 부유하고 풍요로운 집안 환경 속에서 그가 태어났다. 하지만 아버지가 서울에서 바쁜 사업 관계로 김현식은 어머니와 함께 외가에서 어린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그래서 국민학교 때까지 아이들에게 서울 촌놈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그들과 융화되지 못한 채 항상 그들을 혼내주기에 바빴다. 그런 그의 시골생활은 진한 고향냄새를 안겨주지는 못했지만 낭만스럽고 자유로운 공간으로 가슴속에 자리를 잡아갔다.


* 파아란 하늘,아주 깜깜했던 밤,별이 유난히도 많았던 밤. 그런 아름다운 추억으로 *

그 후,김현식은 아버지의 사업이 안정되면서 4학년 때 서울 삼청국민학교로 전학을 오게 되었다. 후에 음악을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학교에 우연하게도 전인권이 6학년을 다니고 있었다. 김현식은 어렸을 때부터 고집이 세고 독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는데 이것은 그가 음악생활을 하면서도 그러했고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도 이어졌다. 다시 6학년 때에 당시 학군제의 변경을 결정한 문교부의 방침 때문에 그는 수유 국민학교로 전학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잦은 전학은 그의 어린시절에 친구를 시귈만한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때서부터 그의 외로움은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엄격했던 아버지 밑에서 그의 성적은 늘 상위권을 맴돌았으며 다른 어떤 것에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그는 당시 명문이었던 보성 중학교에 전교 4등이라는 성적으로 입학을 하였다. 그리고 그때쯤 그는 처음으로 기타를 만지기 시작하였다. 선천적 소질이 있었던 탓인지 연주실력은 날로 향상 되어갔다.

당시 박인수의 <봄비>,비틀즈의 <오,달링>,CCR의 <프라우드 메리> 등이 그의 단골 레파토리였다. 하지만 그렇게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 행복감이 깊어질수록 성적은 계속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평소 운동을 좋아하던 김현식은 음악 말고도 아이스하키에 들어가면서 급기야 공부만 하던 모범생에서 기타와 스케이트에 정신이 팔린 문제아로 낙인 찍히게 되었다. 그러던 시기에 그에게 처음으로 시련이 닥쳤다. 그것이 그에게 있어 큰 영향을 주지 않았더라도 간장공장을 하시던 아버지의 사업이 갑자기 기울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런 일이 없었더라면 그는 가수가 아닌 아이스하키 선수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고입에 닥쳐 그는 다시 공부를 하였으나 명문 경기고에 낙방,잠시 방황기를 보내며 기타를 벗삼아 지내다가 후기로 명지고에 입학하였다. 그가 명지고를 택했던 이유는 단지 그학교의 밴드부가 유명했기 때문이었다. 전교 3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을 하였으나 그는 선생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밴드부에 들었고 이때부터 음악을 하겠다는 마음을 굳혀갔다.

겁없이 떠도는 거센 방황을 부드럽게 잠재우는 것이 음악이었고 몸서리치게 밀려오는 외로움을 따듯하게 어루만져 주는 것 또한 음악이었다. 그때는 그것 뿐이었다. 하지만 밴드부는 그런 기대감과는 달리 그의 음악적 욕망을 채워주지 못하였다. 잔심부름이 고작이었고 걸핏하면 단체기합을 주는 선배들의 눈치를 보아야했고 그런 선배들이 없는 틈을 타 트럼펫을 불어본 것이 잘못 걸려 건방지다며 심하게 구타를 당하게 되었다. 그것이 김현식의 반항기질을 건드리게 되었고 '밴드부에 들어와 악기를 연주하고 싶었던 것이 무슨 죄가 되느냐'며 대들다가 선배들과의 주먹다짐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런 일을 계기로 그는 공부도 음악도 흥미를 잃게 되었고 깊은 좌절감으로 부모 몰래 학교에 자퇴서를 쓰기로 결심하였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안 집에서는 난리가 났지만 결과적으로 김현식은 가수로서의 진로를 굳히게 된 것이다.


 

검정고시 학원에 다니면서 그는 무명 통기타 가수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음악이야기에 더욱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그무렵 음악다방에서는 가수 지망생을 위한 오디션이 있었는데 그는 호세 펠리치아노의 <Once There Was A Love>,비틀즈,CCR의 노래를 즐겨 불러 그의 실력을 과시하였다. 그리고 명동의 '쉘부르','썸씽'그리고 당시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던 국제호텔 나이트클럽 등에 출연하면서 다운타운가에 그의 이름이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 후,그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이장희氏의 친동생 이승희를 만나 듀엣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나이트클럽과 라이브 업소에서 일을 하기 시작하였다. 얼마 후 서로의 음악성을 위하여 이승희와 헤어지기로 합의,다시 김동환을 만나 듀엣을 하기로 의기투합 함께 피나는 연습끝에 다운타운가에서는 꽤 인정받는 듀엣으로 불려다니게 되었다.

그러나 김현식은 이때에 심한 좌절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 밤업소일에 지쳐있던 그가 피곤을 잊기위해 잠시 대마초에 손을 댔던 것이 경찰에 구속되었던 것이다. 바로 1978년의 일이었다. 8개월동안 실의와 죄책감에서 고생을 겪은 후 그가 다시 돌아갈 곳은 밤업소 일과 음방다방 뿐이었다. 이 시기에 만든 노래가 <봄여름가을겨울>이었다. 그때 그의 음악성과 열정을 지켜보던 음악선배 이장희가 그에게 서라벌레코드를 주선해 주었다. 하지만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고 난 직후의 김현식의 이미지를 염려한 탓에 그의 앨범은 녹음이 끝나고 2년이 지난 80년에 비로소 데뷔앨범을 발표하게 되었다.

이 앨범엔 김현식의 데뷔곡이자 훗날 그가 결성한 그룹의 이름으로 사용되기도 한 <봄여름가을겨울>이 수록되어있다. <당신의 모습>이라는 곡은 김현식이 스무살 즈음 만든 곡인데 그가 애착을 가진 곡으로 어디서 노래를 불러 달라고 하면 꼭 이노래를 부르곤 하였다. 그래서 2집에도 다시 수록하였고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 그의 옆에 세운 '노래비'에 그 노랫말로 채워넣기도 하였다.

그는 본격적인 가수의 길로 접어든 것같은 행복감을 느꼈다. 조그만 무대에서 어설픈 몸짓으로 노래를 불러도 그에게 박수를 쳐주고 비록 얼굴을 많이 내보이지는 않았지만 간혹 알아봐주고 반가워하는 팬들이 있어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그렇게 가수의 커다란 숙원인 독집앨범을 내어 정식가수로써 한걸음 내딛게 되었지만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이유모를 공허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내가 걷고 있는 길이 진정 음악을 위한 길인가'하는 정체성에 대한 물음이 꼬리표처럼 그의 생각을 쫓아다니고 있었다.

다시 방황을 하며 거리를 헤매이던 시기 신촌에서 옷가게를 경영하던 김경자氏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 외롭고 쓸쓸한 서성임 끝에 만나게 된 사랑이었고 허전한 마음을 사랑으로 채울 수 있다고 믿은 그 두사람은 82년 봄 명동의 YMCA 강당에서 잘아는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을 하게 되었다.

막상 사랑으로 결혼을 하게 되었지만 앨범 한장을 낸 무명가수가 현실을 지탱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부인의 솜씨를 빌어 피자가게를 내게 되었지만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최신식 설비를 갖춘 대형가게에 밀려 문을 닫게 되??그에게 음악만이 삶을 다시 개척하는 길이었다. 그때가 84년이었다.

김현식은 2집 준비를 위해 서라벌에서 동아기획으로 옮기게 되었다. 당시 동아기획은 들국화를 방송에 의지하지 않고 라이브무대만으로 대단한 인기를 모우고 있던 의식있는 프로덕션이었다. 동아기획은 무명이지만 김현식의 음악적 가능성에 큰 기대를 걸었고 김현식은 동아기획이라면 자신이 추구하는 음악세계를 가장 이해해 줄 것 같았다. 그렇게 동아기획과 김현식은 역사적인 만남을 이루었고 그런 서로의 생각은 기대 이상이였다. 데뷔앨범에서도 몇편의 자작곡을 발표한 바 있는 김현식은 2집에서 10곡 중 9곡을 작곡해 실력파 싱어송라이터로 확고한 자리를 굳혔다.

그 중 <사랑했어요>는 많은 대중들에게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고 <어둠 그별빛>,<바람인줄 알았는데>,<아무말도 하지말아요> 등도 다운타운가를 중심으로 꾸준한 인기를 모았다.


김현식은 이처럼 자신의 인기가 급속도로 오르자 본격적인 자신의 그룹을 결성해 보다 활동적인 무대를 갖게 되었다. 그는 평소 함께 음악을 하고 싶었던 사람들을 모았는데 그 ?繡測?현재 '봄여름가을겨울'의 김종진,전태관과 '빛과 소금'의 박성식,장기호,그리고 <지난날>,<사랑했기 때문에>라는 명곡들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유재하였다.

그는 자신의 데뷔앨범에 있는 곡명을 그대로 딴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이라고 팀명을 정하고 그들과 함께 방송보다는 콘서트와 라이브 무대에서 생생하고 살아있는 음악을 들려주었고 콘서트 문화를 우리나라에 정착시키는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86년 4월부터는 개인적인 음악활동 뿐아니라 이정선,엄인호,한영애,정서용 등 실력있는 가수들과 뜻을 같이해 연대 앞에 위치한 '레드 채플린'에 모여 잼 형식의 공연을 갖기도 하였다. 정해진 형식에 갇혀있기 싫어하는 그의 성격이 타 가수들처럼 방송에 얽매이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고 자유로운 음악활동을 펼쳐 이른바 '얼굴없는 가수'로 유명해졌으며 이러한 가수들을 통칭하는 '언더그라운드'라고 불리는 것도 이즈음이었다. 방송을 타지 않고 음악만으로 대중과 교류를 이루는 실력파 가수들의 대명사처럼 쓰인 '언더그라운드'의 대부분은 동아기획의 가수들이었고 그 중 김현식은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연출하는 독보적인 위치를 구축해 나아갔다.

그의 활발한 활동이 지속되면서 이어 86년 3집을 발표하였다. 이 앨범에는 지금까지도 많은 음악관계자나 대중들에게 명곡으로 평가 받으며 김현식의 대표곡이라고 꼽힐 수 있는 <비처럼 음악처럼>,<빗속의 연가>,유재하 작사.곡인 <가리워진 길> 등이 수록되어있다. 이는 음악성과 대중성을 적절히 조화된 앨범으로 그의 독특하고 개성있는 매력을 느낄 수 있다. 높은 음반판매량,작사,작곡,녹음,쉴틈없는 연습 그리고 수차례의 라이브 공연에 이르기까지 폭발적인 음악열정을 가진 그에게 있어 최고의 전성기였고 가장 바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 생활은 잠시, 마음 한구석에는 채워지지 않을 공허감이 있었다. 노래를 하면 할수록 그 공간은 점점 커져만 갔다. 그는 늘 그런 공허감과 이유모를 외로움에 시달려야 했다. 그것은 끝내 그에게 다시 대마초를 접하게 하였고 87년 10월 김현식을 비롯한 들국화의 전인권,허성욱 등 마약상용혐의인 차디찬 철창이 내려졌다. 그의 미래를 단절시켜버린 듯한 침침한 철창안은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고 그는 헤어나기 힘든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비록 2개월 남짓한 시간이었으나 그에게 있어 그 기간은 2년도 넘는 긴 세월처럼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오던 날 그는 긴 악몽에서 깨어나기 위해 참회의 뜻으로 머리를 삭발을 하였다. 구속기간동안 깊은 고통과 참회의 마음이 팬들에게 받아들여질까 하는 두려움과 재기의 가능성에 대한 불안감을 안고 삭발을 한 채 라이브콘서트를 열었다.

그러나 6천명 넘게 모인 팬들은 그를 용서하였다. 그리고 진심어린 따스함으로 그의 재기를 반가워했고 그의 음악열정에 박수를 보냈다.<비처럼 음악처럼>을 부를 때 이미 그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해 말 3집 앨범판매고와 <비처럼 음악처럼>의 인기를 통하여 제3회 일간스포츠 골든디스크상을 수상했다. 골든디스크상 수상은 언더그라운드 가수로서는 최초였으며 한국적인 감성과 혼을 허스키하면서 샤우트한 음성으로 토해낸 노래가 대중에게 꾸준한 사랑을 모았으며 평론가에게 크게 인정을 받아 그의 재기의 발판이 마련된 셈이다.


88년 블루스와 소울을 가미한 <언제나 그대내곁에>를 타이틀로한 4집 앨범을 발표하였다. 이 앨범에는 그가 아끼던 끈끈한 하모니카 연주곡인 <한국사람>이 담겨져있다. 그는 신촌블루스와 <골목길>,<환상> 등이 담긴 앨범도 함께 발표하는 등 왕성한 음악활동을 벌였다. 그러면서 그는 술을 마셨다.

유난히 외로움을 많이 타는 그는 주체할 수 없는 음악열정과 현실에 대한 괴리감,음악을 하는 가수로서의 위치와 안정된 생활 사이에 겪는 내적 갈등을 늘 술로 달랬다. 그의 건강을 염려하는 주위의 충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족과 자신의 생활에서 안정을 찾지 못하고 술과 방황을 하였다. 그럴수록 그의 건강은 나빠만 갔고 항간에는 그가 간암에 걸렸다,시한부 인생을 살고있다는 소문도 커져만 갔다. 그런 소문들을 불식시키고자 그는 건강이 악화되어감에도 불구하고 89년 신형원,권인하,강인원과 함께 옴니버스 영화앨범 <비오는 날의 수채화>를 발표하여 적극적인 자세로 음악활동을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술을 떼어놓지 못하였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모든 일?【?자유롭고 싶던 그에게 서서히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날로 상해가는 얼굴색과 붓기가 가라앉지 않는 몸을 보면서 많은 동료가수들이 안타까와했고 그는 마지막 투혼을 노래에 쏟아 붓고 있었다.

90년 3월에는 자신의 미처 내뱉지 못한 마음을 담은 듯 <넋두리>를 타이틀로 한 5집 앨범을 발표하였다. 이는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반추해 보며 그가 자전적으로 꾸며본 앨범이었다. 그리고 다시 바로 6집 앨범 준비에 들어갔다. 병원측에서는 김현식의 건강이 너무 악화되어 절대 안정을 요구했으나 그는 이를 무시하고 음악에만 매달렸다. 사랑하는 것들을 모두 남겨두고 떠나야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었을까. 그의 그런 활동은 외로움과의 처절한 싸움같았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6집 앨범을 채 마치지 못하고 90년 11월 1일 세른 둘의 나이로 그는 세상을 떠났다. <내사랑 내곁에>가 담긴 6집에는 그 공백을 그가 사람들의 가슴 속에 남겼던 예전의 노래들로 채워져 유작앨범으로 발표되었다. 그의 습작을 엮어 내놓은 날 많은 동료가수와 그를 아끼던 팬들은 그의 짧았던 생을 아쉬워했고 그가 가지고 떠난 무한한 음악적 가능성이 너무도 그리워  91년 2월 9일 추모콘서트에는 63빌딩 공연장에 빼곡히 모여 그가 남겼던 노래를 부르고 그의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흘렸다.


* 음악이 전부였던 삶 *

혼신의 힘을 다해 블루스와 소울 창법으로 토해내는 그의 뛰어난 가창력, 록이나 블루스를 통한 한국적 소리를 자신의 독특한 빛깔로 채색한 진한 노래, 불꽃같은 열정을 피웠던 그가 살아있었다면 지금은 또 무슨 말을 남겼을까. 또 무슨 노래를 불렀을까.

마지막까지 투혼을 불사르며 병실에서 녹음을 하였던 그가 미처 세상에 내놓지 못했던 곡들이 빛을 보게 되는 날 우리는 다시 가슴에 묻어둔 김현식의 음악에 대한,김현식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위의 글은 그가 생전에 소속되었던 동아기획사 홈페이지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그를 기억하고자 만들어진 공간입니다… 2001년 01월 21일 ~ 2019년 04월 22일… … 전체방문자 252,810  오늘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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